1963년 9월 14일 아버지를 만났다.
가난한 농부였다.
승국(勝國)
나라의 큰 일꾼이 되길 소망하며 이름을 지어 주셨다.
내가 감기로 힘들어할 때 품에 꼭 안아 기도를 해주시는데 아버지의 냄새는 역겨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내 몸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새벽이면 새벽기도를 다녀와서는 내 머리맡에서 주문과도 같은 기도를 하신다.
잠결에 늘 자식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셨다.
그림을 잘 그려서 성경 말씀을 그림으로 시청각 설교하셨던 아버지셨다.
그리고 글을 잘 써서 성경 시를 쓰시고 성탄절에는 교회에서 시 낭송하시곤 하셨다.
아버지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주일이면 청년들이 우리 집에 가득했는데 고구마 농사는 이들을 위한 농사였다.
그 당시에는 교회 재정이 부족하여 목회자를 구하지 못하는 교회가 많았다.
농사일은 늘 시간이 부족한데 언제부터인가 수요일 오후 5시에 집에 오셔서 바쁘게 씻어 성경책을 들고 나서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삼양에서 신촌까지 걸어서 몇 년을 신촌교회를 섬기셨다.
밖에서 일하고 계신 어머니가 무언가를 자를 일이 있어서 집안에서 가위를 가져오라고 심부름시키셨다.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없다고 하니 "잘 강초자 보라."
제주말이라 풀이하면 "가서 잘 찾아보라."라는 말이다.
옆에 있던 아버지께서 "어머니 잘 봐불라."
어머니 존함이 강자 초자 자자다.
재치가 있으신 아버지셨다.
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 집 일까지 해주시곤 했다.
경운기로 밭갈이, 짐 실기 등
정말로 부지런하셨다.
예전에는 아동부도 수요예배가 있었다.
학교도 입학하기 전 일일 거다.
일하고 있는 밭에서 오후 5시에 교회 종소리가 들리니까 따분했던 나는 교회 가자고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일손을 놓지 못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어른 예배를 같이 드리자며 달래도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여 어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예배당 앞에까지 칭얼거리는 나를 밀쳤는데 그만 교회 머릿돌에 머리가 부딪쳐 혹이 크게 난 적이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안티프라민을 발라 주시면서 가슴으로 많이 울었을 아버지, 이것까지도 아버지는 마음에 담고 계셨다.
내가 초등학생 때다.
마을 집마다 소를 키우는데 두 집씩 '쇠번'을 짜서
아침에 소를 전부 모아서 들로 풀을 먹이러 갔다가 저녁까지 쇠테우리를 했었다.
하루는 사촌 승남이 형하고 같이 갔었는데 학교에서 조회 시간에 "하나둘 셋 넷" 하며 아이들 소리가 들려 형이 자기에게 맡겨 두고 학교 가라 했던 적도 있었고 어머니께서 도시락에 꼭 고등어구이를 해 주셨는데 들판에서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바쁜 일손을 보태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감히 짐작 못할 것이다.
학교에서 육성회비가 밀려 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침에 학교 가면서 또 벌을 받을까 봐 새벽에 밭에 가버린 아버지를 찾아가 육성회비를 달라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울면서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가을 소풍날 밭에 있었다.
원당봉 산허리에서 "2학년 1반 모여라."
왜 그날따라 소리가 건질모실까지 크게 들리는지.
운동회날 달리기를 하고 아버지에게로 갔다.
뒷짐 지고 서 계시고 있던 손에 한 모금도 채 마시지도 않은 콜라병을 나에게 건네주신다.
난생처음 맛본 콜라 맛
어느 여름날 해수욕장에 있었다.
한관용목사님, 건의장로님 등 교회 사람들이 있었다.
수영복이 아닌 낡고 허름한 삼각팬티를 입고 계신 분, 나의 아버지였다.
부모님은 새벽에 연탄불에 밥을 얹혀 두고 잠에서 덜 깬 나에게 밥이 다 되면 밥 먹고 학교에 가라고 하고 선 밭을 향하셨다.
밥이 다 되면 깨나지 한 것이 밥이 숱같이 타고 냄새가 온 마을에 퍼져 앞집 삼춘이 나를 불러야 깨어난 적이 있다.
욕먹을 게 뻔한 마음에 숱같이 탄 밥을 나무 밑에 묻고 새로 쌀을 씻어 밥을 했는데 탄 냄새가 어디 가겠는가.
저녁에 아버지께서 괜찮다고 말씀하시며 눈시울이 붉어 있음을 보았다.
비닐하우스에 오이, 토마토 농사를 지었다. 여름 방학 때면 하우스 작물에 물을 줘야 했는데 발가락에 무좀이 생겨 지금까지 발에 무좀이 있는 이유다.
하루는 토마토를 짐 자전거에 싣고 삼양1동 상점에 배달을 가는 데 초등학생 다리의 힘으로 조그마한 동산을 못 오르고 그만 쓰러지는 바람에 길바닥에 토마토를 널 부러 놓은 적도 있었다.
그런 적마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의 미안해하는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까까머리 중3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는 우리 집안에 큰아들이니까 아버지가 없더라도 동생들을 돌보며 우리 집안을 잘 지켜야 한다.”
아버지께서 일본에 가고 나서야 마음의 큰 부담으로 다가서며 그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있었다.
중3 어쩜 나로서는 아버지가 제일 필요한 시기였는데 말이다. 그러니 공부는 아예 뒷전이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공부 잘했던 친구로 생각한다.
부모님께서 결혼하시고 5번을 이사했다.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생활하다 보니 우리 밭, 집을 구할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돈을 벌었기에 드디어 지금의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일본은 밀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일본 경찰을 피해서 산중에서 하룻밤을 세야 했고 작업하다 20m 아래로 떨어져 죽을 뻔도 하면서 엄청나게 고생하셨다.
더욱이 사랑하는 자식들이 눈에 밟혀 그리움과 외로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께서 하시던 감귤 과수원 밭을 어머니와 일해야만 했다. 농약을 뿌리고 나면 냄새가 온몸에 배어 일주일 내내 냄새가 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큰어머니네 밭일도 했는데 경운기로 밭을 갈다가 경운기가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
벌초는 큰어머니와 단둘이 다녔는데 그때는 호미로만 해서 온종일 걸려 점심을 도련 벌초하고 나서 하우스 창고에서 먹곤 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하기가 싫어서 비가 계속 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다.
어쩜 큰어머니께서도 아들 아들 하며 격하게 반가워하는 이유도 같이했던 시간들 때문일 것이다.
24살 때 저의 아내를 만났다. 만남을 더해 가며 결혼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남녀가 교제하게 되면 잘못될까 걱정이 되어서 여자 집에서 결혼을 서두르는 경향이 많았을 때였다.
저 역시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만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위해 일본에서 고생하시는 아버지가 오시면 하는 게 도리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밑에 동생이 혼인신고를 하고 아기를 낳아 커가는 상황이고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 더 이상 미루는 것이 안 될 것 같아 29살 겨울에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채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날 일도 안가시고 큰아들의 결혼식을 같이 못 한다는 죄책감에 통한의 눈물로 타국땅에서 종일 울었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오는 길 공항으로 꽃다발을 사고 아버지를 마중했는데 첫마디가 "승국아! 미안하다"
세월은 많은 변화를 일으켜 이질감으로 다가섰다.
아버지는 일본이라는 조금은 선진화된 의식구조를 그대로 여기의 삶에 적용하다 보니 많은 불협화음과 특히 어머니와의 갈등이 심했다.
언쟁과 중재 속에서도 늘 나에게는 "너에게는 할 말이 없다."였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불편함이 단지 오랜 시간 단절된 것에 의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동생들 셋은 아버지를 모시고 결혼식을 치렀는데 마음 한쪽엔 나에 대해 미안함에 마냥 기쁨을 드러내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 잘살고 있다, 죄책감 느끼지 말라, 괜찮다.
어떠한 말로도,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분제원 같은 데를 많이 모시고 다니며 대화로 마음의 짐을 풀어 드리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재산이라고는 아버지께서 일본 가서 마련한 지금의 집이 전부다.
상수원보호 구역이라 재산권 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제값을 주지 않는 지역이다.
구매 당시 초가집이었는데 새로 집을 지으면서 무허가로 지을 수밖에 없어서 등기 설정이 안 되어 있다.
재산 문제로 형제간 분쟁이 있을 수도 있어 아내가 재산 관계를 정확히 해서 놔두게 좋을 거라 했다.
저희는 제사 명절도 안 하니 어떻게 해도 좋으니 큰아들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명확하게 아버지 견해 표명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어느 날 삼 형제를 부르시고 집을 큰아들인 나에게 이전한다고 하셨다.
전혀 생각지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치과에 갔던 날이다.
가는 길 차 안에서 "이제는 조금 너에게 짐 벗은 거 닮다."
진료를 마치고 치과 앞 사촌 여동생네 가게를 들르고 차도 마시고 얘기를 하다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
근처 식당을 걸어서 가는데 내 손을 꼭 잡고 걸어가시는 것이었다.
나중에 여동생이 "오빠! 아버지랑 손잡고 걸어가시는 게 너무 보기 좋더라."
그날 아버지가 짜장면을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아버지께서 거동 못하시고 집에서 요양할 때 마음을 열고 많은 이야기를 하며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같이하게 되었다.
이제서야, 참 불효자식이다.
2022년 1월 14일 저녁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 세상을 마감하며 소천하셨다.
내 나이 60, 아버지와 같이했던 시간 60년!
아버지와 나
안타까움, 어쩔 수 없는 선택, 삶, 고생, 희망, 살아내야 하는, 가족, 자식, 부모, 기도, 교회, 불효자, 일본, 보고 싶음, 그리움, 농사일, 갈등 등으로 전혀 화려하지 않은 색들로 그려낸 '사랑'이라는 모자이크 작품이었다.
'삶의향기 ------…─• † > ″```о♡ 아버지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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