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Forest, Green Garden…
도량이 깊고 넓어 그리 큰 굼부리를 품고 있는가? 삼신왕이 기도했다는 왕이메에는 신의 초록정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정면에 보이는 왕이메오름, 정말로 서부오름의 대표격이 맞는가? 라는 의문이 솟아날 정도로 나지막해보인다. 우거진 숲 사이사이에 쏟아지는 햇살로 겨우 그 밝기를 유지하고 있는 숲, 처음 왕이메에 온 사람이라면 겁부터 덜컥 나지 않을까싶다. 왕이메는 대형 분화구를 비롯하여 3개의 굼부리를 지닌 복합형 화산체이다. 워낙 숲이 우거지다보니 방향감각을 잃기 십상인 곳으로 뚜렷이 나있는 길 외에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하는 마음은 자제하자. 나지막한 산이라도 꽤 오른다.
보기보다 고도가 있다는 얘기일까? 꼬불꼬불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20분쯤 가면 어느덧 눈이 환해진다. 한라산 정상에 구름이 짙게 머물러 아쉬움이 남지만 남서쪽으로 보이는 산방산과 금오름을 비롯한 오름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서부오름의 대표격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깊은 분화구 안을 들여다보니 초록의 바다정원이다. 짙푸르고 울창하여 그 속에서 제 방향이나 찾을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일 정도이다. 어딘가에서 삼신왕이 기도를 하였겠지 하는 마음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상에서 좌·우로는 뚜렷한 등산로가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마음을 굳게 다지고 굼부리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이 한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워낙 우거져서 수많은 사람이 다녀가도 숲의 영역을 많이 침범하지 못하였나보다. 내려간다고 여겼는데 조금 내려가더니만 한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내려가는 길이 안보이고 무작정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니 결국 굼부리 안쪽으로 둘레를 빙 돈 셈이 되었다.
한 시간 남짓 걸었나. 햇살이 겨우 얼굴을 내밀 정도로 우거진 숲이니 덥지야 않지만 가도 가도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으니 오히려 가슴이 서늘해진다. 결국 일행을 나누어서 선발대가 먼저 내려가 보기로 했다. 대형 분화구, 그 실체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선발대에 끼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굽이굽이 오솔길 중간에 삼나무 숲이 나오고, 다시 내려가니 어느새 하늘을 가리는 나무가 사라졌다. 드디어 분화구에 도착했다. 분화구 안에서 바라보는 왕이메의 등허리가 부드럽기도 하다. 구름과 하늘이 어우러진 자신만의 호수를 품고 있는 왕이메의 분화구는 그렇게 나를 맞아주었다.
분화구 안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른 길로 나가볼까 하는 모험심을 접었다. 들어온 길이 그러하였는데 나갈 때는 오죽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우리 일행이 분화구에서 쉬고 있을 때 우리를 지나쳐서 다른 길로 나갔던 등산객을 우리가 나오는 길에서 딱 마주쳤다. 분명히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역시 다른 생각 말고 들어온 길로만 나가기로 한다. 삼나무 숲을 지나는데 미끈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 두 마리가 다가온다. 참 잘생기기도 하였다. 둘은 숲 사이를 함께 누비는 짝일까. 저 너머에 내려둔 배낭으로 다가가 두 말이 코를 들이민다. 그곳에 물밖에 없단다. 워~ 워~ 꿈쩍도 안하는 말을 소리 내어 멀리 보내고는 다시 올세라 후딱 줄행랑이다. 또 다시 한 시간을 가까이 걸어 굼부리를 벗어나고 십 여분을 하산하여 왕이메 오름을 뒤로 하였다.
왕이메오름은 길을 잃기 쉬운 오름이므로 전혀 도움 안 되는 방향감각만 믿고 등산로 아닌 길로 들어가는 것은 삼가자. 특히 처음 왕이메를 오르는 사람이라면 더하다. 그리고 이 계절에 오름을 다니다보면 뱀이 나올 수도 있다. 왕이메를 오르는 내내 한 마리도 볼 수는 없었지만 조심은 안전한 산행을 위해 필요하다. 왕이메오름을 다녀온 후에는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우거진 숲과 끝도 없이 걸었던 길, 그리고 깊고 넓은 분화구에서 바라본 하늘호수가 아른거린다.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왕이메, 다시 찾고 싶은 오름이다. 특히 복수초가 피어날 때 설중 복수초를 만나기 위해 가보련다.
산굼부리가 한라산 동부 오름군의 대표라면 왕이메는 산세는 우람하지 않은데, 품고 있는 굼부리가 깊고 넓어 서부오름군의 대표로 꼽히는 오름이다. 옛날 탐라국 삼신왕이 이곳에 들어와 사흘 동안 기도를 드렸다는 전설이 있어서 왕이메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암메창(굼부리)에 제주에서도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복수초가 피어나는 것을 보면 굼부리 안은 다른 별세계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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